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왔지만, 퇴근 후의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러웠습니다. 할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보다, 뭔가 ‘아직 덜 한 느낌’, 메신저와 이메일의 잔상, 사람들의 말, 영상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열면 또 다른 정보의 파도가 몰려왔고, 유튜브 한 편, 인스타그램 몇 장면, 뉴스 한두 개를 보다 보면 몸은 쉬고 있지만 뇌는 과로 상태로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져보면 어떨까?
그 시간을 루틴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부터 ‘의도적 멍 때리기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 멍 때리는 시간이 뇌에게 필요한 이유
‘멍 때린다’는 말은 왠지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심리학과 뇌과학에서는 이것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활성화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뇌가 외부 자극을 받지 않고, 내면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모드로 전환되는 상태입니다. 즉, 멍 때리기는 단순히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감정, 기억, 생각을 정리하고 회복하는 매우 중요한 뇌 활동입니다.
2. 멍 때리기의 효과
- 과잉 정보에서 뇌를 잠시 해방
- 감정 정돈과 스트레스 조절 기능 회복
-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다시 떠오르는 준비 단계
- 무기력한 감정 흐름을 천천히 정상으로 복원
그래서 퇴근 후의 1시간 중 단 10분이라도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과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3. 의도적 멍 때리기 실험
2주간 매일 퇴근 후 10~15분씩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루틴을 실천해보았습니다. 단,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영상도, 음악도, 스마트폰도 없이, 그저 조용히 앉거나 누워서 ‘뇌를 쉬게 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1) 공간과 시간 정하기
- 매일 저녁 식사 후
- 불을 낮추고 방 안 조용한 자리에 앉거나 누움
- 창밖이나 벽, 촛불 등을 바라보며 정적인 환경 유지
핵심은 눈은 열려 있어도, 시선을 흘려보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2) 규칙은 단 하나: 생각에 개입하지 않기
-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정리하려 하지 않기
- 판단하지 않기
- 감정이 떠오르면 그대로 흘려보내기
- “지금은 멍 때리는 중이다”라고 자기에게 허용하기
첫 며칠은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이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걸 해야 하지 않나?”, “너무 게으른 거 아냐?” 이런 생각들이 계속 떠올랐고, 자꾸 스마트폰을 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손을 비우고 10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반복하니, 생산성 중독 상태에서 점점 벗어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의 정리가 시작되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낮 동안 마음에 걸렸던 장면들이 멍한 시간 중에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특정한 말투, 내 반응, 누군가의 표정. 그 순간들을 감정적으로 다시 바라보고 흘려보내는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이건 명상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감정 정리’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감정의 잔여물들이
이 시간 속에서 조용히 정돈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멍 때리기 루틴을 시작한 이후, 업무 중 집중력이 좋아지고, 아이디어도 더 쉽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정보로만 가득했던 뇌에 작은 여백이 생기면서 무엇인가 정돈되고, 새로운 흐름이 들어올 공간이 마련된 느낌이었습니다. 매일 바쁘고 빠르게만 살아가다 보면,뇌는 ‘정리 없이 계속 덧쌓이는 상태’로 흘러가게 되는데, 그 덧셈을 멈추고 비워내는 시간의 힘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4. 의도적 멍 때리기를 지속하기 위한 팁
1) 시간보다 환경이 중요
시각, 청각 자극이 최소화된 환경 조성이 중요했습니다. 간접 조명, 무음, 창가, 조용한 음악 없는 환경이 도움이 됐습니다.
2) 멍은 5분만으로도 충분
꼭 15분이 아니어도, 5분간 스마트폰 없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리 효과가 컸습니다.
3) 무기력과 멍 때리기는 다름
무기력은 뇌가 감정을 닫은 상태지만, 멍 때리기는 뇌가 감정을 다시 열기 위한 ‘준비 상태’였습니다. 의도적으로 허용된 멍은 감정을 회복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정보를 쌓고, 감정을 억누르고,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다음 일로 넘어갑니다. 하지만 진짜 회복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 여백을 가질 때 시작됩니다. 퇴근 후 10분, 조용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 그 시간은 가장 ‘쓸모없어 보이지만’, 실은 가장 깊이 회복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저녁에도, 멍 때리는 여백 10분을 허락해보시길 권합니다. 그 조용한 정적 속에서, 생각과 감정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